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과 의사를 많이 배출하여 우리나라 외과학의 기반을 다진 백인제 박사는 1898년 1월 28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을 졸업한 뒤, 1915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에 입학,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 당했고, 10개월간 수감된 후 복학했다. 경성의전 재학 시절 가장 나이가 어린 축임에도 리더 역할을 하였으며, 또 학업에 정진하여 수석의 자리를 내내 놓치지 않았다.
백인제 박사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에 입학, 1921년 수석 졸업을 했다. 사진은 동아일보 1921년 3월 23일자에 게재된 백인제 박사 수석 졸업 관련 기사이다. 아래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 내용을 현재의 말로 바꾼 것이다.
신의사(新醫師) 24명 의학 전문의 졸업식 경성의학전문학교 제5회 졸업식은 작일 오후 두 시에 동교 제1 강당 안에서 열렸는데 교원과 생도 일동이 착석한 후 동교 학생 일동의 군대(君代) 창가가 있고 지하 교장(志賀 校長)의 측어봉이 있은 후 도본(滔本) 교무주임의 학사 보고가 있었으며 졸업 증서와 상장의 수여식이 있은 후 다시 지하 교장의 학생에 대한 훈사가 있었고, 내빈 쪽에서 총독 대리로 송영(松永) 외사과장(外事課場)이 고사(告辭)를 읽은 후 역시 내빈으로 화전(和田) 경성의사회장(京成醫師會長)이 축사를 하고 졸업생 총대로 백린제 군이 답사를 하고 그 다음 간호부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이번 졸업생은 본과(本科)가 24명이요 특별 의과가 13명이요 간호부가 8명인데, 본과 우등생은 백린제 군이요 특별과 우등생은 길촌장이다. 그러나 길촌에게만 일본약국주해(日本藥局註解)라는 상품을 받게 되었는데 그 학교 교사의 말을 듣건대 모든 학과의 성적은 백린제 군이 나으나 다만 결점은 백린제 군이 재작년 3월 1일 조선에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에 제일 선두로 나섰던 일이 있어 징역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으나 집행 유예가 되어 나왔음으로 품행이 좋지 못하여 그리된 것이라 하며 당일 내빈은 총독부 쪽으로 송영 외사과장 외 다수한 관리가 참석하였으며 학부형 편에서도 많이 참석하였더라.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재학시절(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일제에 체포되어 8개월여 동안 고초를 겪었다. 백인제는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3.1운동에 단독으로 참여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의 독립을 희망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9년 3월 27일 학생들에게 선처를 바라는 뜻으로 종로경찰서에 성행조(性行調)를 제출했다. 백인제에 대해서는 "명석한 노력가로 항상 우수한 성적을 얻어 현재 본교 특대생이며 아무런 결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1919년 11월 6일 최종 판결에서 백인제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에 처해졌다. 백인제는 1919년 3월 4일 체포되었으므로 이미 8개월 이상 형을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피고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에는 백인제 외에도 72명이 포함되었다. 사진에 백인제의 이름과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처한다는 판결 내용이 보인다.
백인제는 3.1운동으로 퇴학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경성의전 시절에 부단한 노력과 우에무라와 사토 등 일본인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의사로 대성하는 기초를 닦았다. 백인제는 1920년 복학하여 수석으로 졸업을 했음에도 3.1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해 총독부의원에 근무하며 2년 동안 마취과 일을 맡으면 의사 면허를 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백인제는 이 2년 동안의 '집행 유예' 기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그 결과 뛰어난 마취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으며 이 때 익힌 탁월한 마취 솜씨가 외과 의사로 대성하게 된 데 기여할 수 있었다.
약속대로 두 해 동안의 부수 생활을 끝낸 1923년 5월, 의사 면허증(제537호)을 받았으며 이어 총독부의원 의원에 임명되어 완전한 의사의 자격으로 외과에 근무하게 되었고, 이곳에 근무한 6년 동안 모두 5편의 논문과 1편의 논평을 <조선의학회지>(오늘날 대한의사협회지)에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백인제의 이러한 탁월한 연구, 뛰어난 외과 진료 활동, 성실한 근무 자세 등으로 교수들에게 인정을 받아 1927년 모교 경성의전의 외과 강사로 발탁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논문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를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제출하여 1928년 4월 6일 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약관 스물아홉의 나이에 1928년 6월 1일자로 모교 경성의전의 외과 주임 교수가 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곱 번째로 나온 의학 박사이며, 일제 강점기 내내 경성의전의 주임 교수가 된 사람은 백인제 이외에 유일준이 있을 뿐이었다. 사진은 1928년 3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이며, 아래는 기사 내용을 현재의 말로 바꾼 것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총독부 의원 외과 의사 백린제 씨가 동경제대에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더니 그 교수회로부터 10일 오후 세 시에 통과되었다는 전보가 총독부의원에 왔다는바 동 백 씨는 장차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주임 교수가 되기로 내정되었다 하며, 조선인으로서 주임이 되는 것은 백 씨가 효시(嚆矢)가 되리라더라.
백인제 박사는 1937년 장폐색증에 있어서 상부장관 감압술이 유효한 수술임을 세계 최초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계 학회에서는 1940년 미국의 왕켄스틴이 먼저 보고하였다. 사진은 이를 애석하게 여긴 백인제 박사의 일본인 제자들이 그의 발표 내용을 그림을 그려 보내 준 것이다. 현재 부산백병원에 보관되어 있다.
백인제 박사의 임상 강의 모습. 한국인 학생은 물론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진단의 정확함과 대담하고도 정확한 수술 그리고 명쾌한 강의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백인제에 대해서 물으면 거의 예외없이 '당대 제일의 외과 의사' 또는 '도규계의 일인자'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외과는 기본적으로 손을 놀려서 하는 의술인데, 백인제의 섬세한 손놀림은 모든 사람의 찬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과와 관련되는 과학 지식을 자기 것으로 하는 노력을 부단히 하였고 또 과학 정신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당대 제일의 외과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 속의 서울의대>'외과학의 개척자-백인제'에서 발췌
백인제 박사는 수혈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근대 수혈의 역사는 6.25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백인제 박사의 수혈 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 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 번째 연구인 「일본·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 속별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 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를 1922년 12월 <조선의학회지> 제40호에 발표하는 등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者)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 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 협회를 외과 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 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수술 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 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1954년 초 백병원이 민간 병원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의 바탕이 되었다.
사진은 1929년 6월 10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친자 감정 관련 기사로, 아래는 현대의 말에 맞게 고친 것이다.
실자 확인소(實子確認訴) 원고가 승소
홍성군 홍복면 갈산리 송창목은 아비가 두 사람이되 한 사람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 하여 참아비를 찾고자 얼마 전부터 공주지방법원에서 산근흥면 마금리 부호 최완식을 상대로 실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이래 당 법원에서 의혹 중인 문제인 만큼 공판도 여러 번 열고 사실 심리와 증인 신문이며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 의학 박사 백린제씨의 혈액 감정도 한 결과 지난 5일부로 원고 소년 송창목은 피고 최완식의 실자로 확정 판결이 되어 송창목은 참으로 아비를 찾게 되었다더라.
백인제와 유상규는 경성외전 외과학 교실의 교수와 강사 사이를 넘어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유상규는 백인제와 같은 해에 경성의전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결국 백인제의 제자가 되었다.
<선각자 백인제>259면에 실린 김희규의 증언에 의하면 둘은 경성의전 동기이자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고 하며, 같은 책 235면 백향주의 증언에 의하면 백인제의 집은 유상규의 동생 유상하가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백인제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기행문 <인도양(印度洋)을 건너며> 1937년 1월 13일자 첫 회분을 보면 유상규와의 관계에 대해 '二人同心(이인동심)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으며, 한 단락을 유상규의 사망에 대해 쓰고 있다. 백인제가 흥사단과 관계를 갖게 된 것도 유상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인제는 해방 직후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단우 번호는 1102번이다.-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의사학 제18권 제2호 157-172', 2009.에서 발췌
백인제 박사는 1928년부터 지속적으로 통속 의학 강연회에 참여하여 의학 지식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여기서 '통속' 이란 대중을 상대한다는 뜻이다. 아래는 1935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의전 교수 백 박사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알거니와 백인제 박사는 해교(該校: 경성의전) 외과과장으로서 유명할 뿐 아니라 외과학에 있어서 조선의 권위이다. 박사의 강의 시간에는 무더운 때라도 낮잠을 잘 수 없으며 그 수술을 볼 때는 감탄의 소리를 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1930년 10월 23일자 동아 일보에 실린 백인제 박사에 대해 적은 기자의 글이다.
구두질 수술쟁이 백인제 박사 골병(骨炳)과 일광욕을 연구 - R 기자
의전 교수 백인제 박사! 울툭불툭하기론 돌밭 같다는 선생을 찾기에는 송구스러웠다. 마치도 어린아이가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때와 같은 감을 느끼었다. 선생의 인정(人情)없이도 울툭불툭한 이 성질이 선생으로 하여금 명의(名醫)를 만든 유일의 요소라 할 것이니 병자들이 아프다고 죽을상을 하고 함성을 지르나 선생은 들은 체도 않고 쇠꼬챙이로 부엌 고래를 훑듯이 훑어 버리는 데는 제일 선수로 병에는 백발백중이라 한다.
이같이 선생은 아프다는 사정을 보지 않는 의사, 연구에서보다 차라리 실제에서 선생의 능한 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급기야 만나 보니 선생의 외모만은 예상과 달리 매우 반질반질하였으며 선생은 책상 위에 장난감 같은 조각이 서 있는 것이라든지 천녀(天女)들의 나체화 같은 것이 걸리어 있는 것을 보아서는 선생의 그 울툭불툭한 성질과는 반대되는 아니 그 울툭불툭한 성질 한 모퉁이에 간지럽고도 보드라운 정이 살아 있는 것이 마치도 험상궂은 남자의 손에 보석 반지가 끼인 듯한 감을 일으킨다. 선생은 정주 오산중학교를 마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대정 10년(1921년)에 졸업하고 곧 동교 외과 조교수로 있어 연구를 계속하다가 재작년 여름에 박사의 학위를 얻고 따라 동교의 교수로 있게 되었다.
선생이야말로 앉은 박사이니 의전을 마치고 앉은 자리에서 연구를 하여 박사의 학위를 얻기는 선생이 처음일 것이다. 이 같이 진출한 데는 어떠한 고심과 노력이 잠재하여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연구를 위한 여행은 상당히 하였다. 대만에서 토인(土人: 원주민), 봉천(지금의 중국 요령성 심양)에서 중국인의 혈액 검사를 하였고 금년 봄에 구주 시찰까지 마치고 귀국하였다. 스위스에 가서 골병과 일광욕의 관계에 대한 시찰을 하였고 백림의대(베를린 의대) 같은 곳에도 들러왔다. 선생은 세계에서 일광욕에 최적지라는 스위스가 조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널리 세계에 조선을 소개하였다 한다.
구주를 휘돌아 오게 될 때 영국 켐뿌릿지(캠브리지) 대학 학생들의 그 쾌활스러운 학생 생활이 특히 눈에 띄었다 한다. 그곳에서는 학교 스트라이크(동맹 휴업)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왜 그런고 하면 학생 전체가 기숙사 생활로 선생들과 동거하게 되어 선생의 지식뿐만 아니라 전인격 그 생활까지 학생의 본이 되어 있다 한다. 차라리 학생들의 제일 친절한 동료 동지가 되어 있는 까닭이라 한다. 구주의 문명! 그에 경탄의 눈을 뜨고 온 선생은 조선의 현실에 하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아마도 그 별천지에선 별다른 꿈도 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사 가지고 만족하여 돌아오셨다는데 돌아와 헤쳐 보니 이 물건 저 물건 모두 영부인의 물건뿐이었다고 한다. 근친들이 와서 보았으면 입을 삐죽거렸겠지마는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인 게 선생 자신이 쓸 물건도 잊어버리고 그랬는데야 어찌하리.
영부인의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현재 배화여교 선생인데 선생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는 손님이 열 명이 와도 고기 한 근으로 돌려 맞추는데 배부르게 먹고도 남게 만드는 묘한 재간이 있다 한다. 선생은 이러한 재미있는 가정에서 떠나기는 기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남의 속 모르는 친구들은 공연히 외출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해서 불평이라고.
선생은 울툭불툭한 명의라는 것은 다 아맂마는 의사의 허울을 벗고 보면 이름나지 않은 숨은 소설가라는 칭까지 있다. 아마도 의사로 일생을 넘기기에는 어디인가 섭섭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백인제 박사의 은사인 총독부의원 소속의 우에무라 슈운지는 외과 의원 개업을 위해 한말 대표적인 친일 부역자였던 조중응에게서 현 서울백병원 위치의 병원 부지와 건물을 사들여 우에무라외과의원을 개원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수제자인 백인제 박사에게 자기 병원을 인수해 줄 것을 요청했고, 백인제 박사가 이를 사들여 오늘날의 백병원의 모체가 만들어 졌다. 일제 강점기 때의 주소는 경성부 남구 영락정 2정목 85번지.
백인제 박사는 1936년 우에무라외과병원을 인수하였지만, 본격적인 병원 경영에 나선 것은 1941년부터이다. 경성지방법원 토지 등기부(사진 참조)를 보면 우에무라외과의 인수 시점, 이병훈의 위탁 경영 사실, 조선식산은행에서 융자를 받은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백인제 박사는 도산 안창호 및 흥사단원들과 교류가 깊었고, 평소에도 도산의 무실역행(務實力行) 휘호를 즐겨 사용했다. 흥사단원들과 1936년 노량진 용봉정에서 야유회를 갖고 기념 촬영을 한 것이다. 2열 중앙의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3열 왼쪽부터 백인제, 주요한, 유기준, 이상준, 유상규, 최경진(백인제 부인)
서재필은 해방 직후인 1947년 미국정 장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과도 정부의 최고 정무관이 되었다. 귀국 직후 백인제 박사 자택을 방문하여 기념 촬영을 했다. 백인제(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서재필(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광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용설(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등이 보인다. 백인제는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백인제의 동생 백붕제는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서재필 자서전을 발간했다.
1941년 백인제 박사가 직접 병원 경영에 나선 후 환자들이 몰려 입원실이 크게 부족하자 1942년 수술실 및 진찰실이 있던 자리에 증축 공사를 해, 수술실 및 외래 병실 7개를 증축했다.
일본인 간호사 마루따의 귀국을 기념하여 수술실과 진찰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가 마루따 간호사, 양쪽에 백인제 박사와 최경진 여사. 백인제 박사의 왼쪽에 돌양이 보인다. 돌양은 병원 창립을 기념하여 백인제 박사가 구해 온 것으로 양쪽에 두 마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해운대백병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