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 박사의 임상 강의 모습. 한국인 학생은 물론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진단의 정확함과 대담하고도 정확한 수술 그리고 명쾌한 강의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1941년 경의전 졸업 앨범에 수록된 백인제 박사 임상 강의 사진
백인제 박사 임상 강의 사진(1930년대 추정)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백인제에 대해서 물으면 거의 예외없이 '당대 제일의 외과 의사' 또는 '도규계의 일인자'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외과는 기본적으로 손을 놀려서 하는 의술인데, 백인제의 섬세한 손놀림은 모든 사람의 찬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과와 관련되는 과학 지식을 자기 것으로 하는 노력을 부단히 하였고 또 과학 정신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당대 제일의 외과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 속의 서울의대>'외과학의 개척자-백인제'에서 발췌
백인제 박사는 수혈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근대 수혈의 역사는 6.25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백인제 박사의 수혈 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 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 번째 연구인 「일본·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 속별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 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를 1922년 12월 <조선의학회지> 제40호에 발표하는 등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者)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 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 협회를 외과 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 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수술 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 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1954년 초 백병원이 민간 병원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의 바탕이 되었다.
사진은 1929년 6월 10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친자 감정 관련 기사로, 아래는 현대의 말에 맞게 고친 것이다.
실자 확인소(實子確認訴) 원고가 승소
홍성군 홍복면 갈산리 송창목은 아비가 두 사람이되 한 사람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 하여 참아비를 찾고자 얼마 전부터 공주지방법원에서 산근흥면 마금리 부호 최완식을 상대로 실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이래 당 법원에서 의혹 중인 문제인 만큼 공판도 여러 번 열고 사실 심리와 증인 신문이며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 의학 박사 백린제씨의 혈액 감정도 한 결과 지난 5일부로 원고 소년 송창목은 피고 최완식의 실자로 확정 판결이 되어 송창목은 참으로 아비를 찾게 되었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