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원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백인제 박사의 제자들에 의해 외과 병원으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백낙환 박사는 특히 복부 외과, 식도 외과에 힘을 쏟았다. 식도 수술은 이미 6·25전쟁 전에 김희규 교수 지도하에 백병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였으며, 백낙환 박사는 1963년 국내 최초로 소아에서의 선청성 거대결장(巨大結腸)에 대한 스완슨 수술법(Swanson's operation)을 시행하였다.
장중첩증의 경우도 1964년 7월 우리나라에서 최다인 350 사례를 백병원에서 발표하는 등 의사로서 명성도 쌓아 갔다. 1968년 백병원 백낙환 원장은 한국인 최초로 골반내장(骨盤內臟) 전적출술(全摘出術)을 성공했다.
아래는 1968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골반내장(骨盤內臟) 전적출술(全摘出術) 성공 백병원장 한국인으로선 처음
백병원 원장 백낙환 박사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골반내장 전적출술에 성공하여 직장암을 앓던 유근원 씨(남. 57세), 방광암에 걸린 김홍완 씨(남, 63세)를 치료했다. 이 수술은 골반 안에 든 직장자궁(直腸子宮) 방광 중의 하나에 암이 생겼을 때 다른 곳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 기관을 모두 적출하고 소장으로 인공 방광, 대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어 주는 수술로 암 치료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1968년 직장암 수술을 받았던 유근원 씨는 1972년 10월, 백낙환 원장 앞으로 "생사의 절망 속에서 백병원 원장님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여 회갑을 맞이했다"는 안부 인사와 함께 감사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백인제 박사는 병원 경영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의료 혜택을 넓히고 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백인제 박사는 1936년 11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의학 연구차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던 중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하고, 미국의 의학이 유럽에 비해 실험과 연구에서 뒤떨어진 반면, 임상 기술은 더 발달한 것을 발견했다. 메이요클리닉은 시골 마을에 있던 사립 병원으로 1889년에 개원한 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 명문 병원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다른 병원과는 달리 일찍부터 외래 진료를 중심으로 하고 특별한 때만 입원을 시키는, 당시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진료 방법을 취하였다. 시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환자에게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시설 구비, 임상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연구 환경 조성, 환자의 재정적 여건을 고려한 의료 수가 책정 등 식민지 의료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백인제 박사는 미국 연수 중 메이요클리닉을 방문하고 이와 같은 공익 재단을 한국에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1946년 백병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 법인으로 만들었다.
백인제 박사가 다녀간 지 30년 후에 백낙환 이사장도 이곳을 방문하고 백인제 박사의 큰 뜻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상. 메이요클리닉을 방문한 백낙환 원장
좌. 1938년 1월 15일 동아일보
우. 백인제 박사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보도한 1938년 1월 16일자 조선일보. 백인제 박사는 두 차례에 걸쳐 구미 의학계를 시찰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메이요클리닉과 같은 훌륭한 의료 기관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