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관리자access_time 2018.08.02 17:18visibility 625
7월8일-7월14일, 5박7일 일정으로 미얀마 의료봉사를 다녀왔습니다.5박7일 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오전9시부터 오후4시까지 100명가량의 환자를 보는 강행군과, 30도 부근의 온도에서 하루 종일 폭우가 쏟아지던 미얀마의 우기 날씨는 모든 기운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낙후된 병원 시설에서 나는 큼큼한 악취, 열악한 화장실 시설을 체험하고 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힘든 것들을 감안하고서라도 이번 봉사는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으며 저에게 다시 이런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면 망설임 없이 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시골 의료봉사를 하게 되면 소화불량, 무릎통증, 피로와 같은 단순한 질병을 가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시곤 합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의 의료봉사는 달랐습니다. 의료 봉사를 위해 가져온 약으로는 어찌 처치할 수 없는 중증의 환자들이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내과를 볼 때에는 심부전 환자가 온다던가, 간 부전으로 인해 pitting edema가 있는 환자가 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보기위해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것을 알기에 환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정말 미안한 일이었고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소아과에서는 microcephaly 환아가 오기도 했는데 약 같은 것을 먹으면 나아질 수 있는지 물어보는 부모에게 “치료법이 없고 병이 호전될 수도 없으며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활치료를 하는 것이 그나마 증세를 조금이나마 호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나 환자에게나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슬픈 순간이 있었다면, 기쁜 순간 또한 많았습니다. 저는 교육팀에 잠시 파견되어 초등학교에서 구충제를 나눠주는 봉사를 하루 동안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에게 “밍글라마~”라고 인사를 할 때 수줍은 얼굴로 환히 웃어주며 “밍글라마~” 라고 답해주는 아이들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또 NSAIDs와 같은 별것 아닌 처방에도 감사표시를 하며 기쁘게 돌아가는 미얀마 사람들을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에 대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봉사와는 별개로 미얀마에서의 문화탐방 또한 많은 추억들을 저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우선 저녁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저였기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 미얀마식 게요리. 미얀마 전통요리. 인도요리. 태국요리... 다들 어찌나 맛있던지... 이외에도 밤마다 학생 스텝들끼리 방에서 모여 가볍게 맥주 한 두 잔을 하며 회포를 푸는 순간도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수 천개의 불상 천국 쉐다곤 파고다, 우기로 물에 잠긴 도로를 신발 벗고 맨발로 걸어간 베데스다 지역병원, 옷 가게가 많던 보족 시장, 미얀마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 국립양곤박물관 모두 나름대로의 즐거운 기억들이 저에게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날, 저희와 스텝으로 동행한 중소기업 사장님 덕분에 수완나폼 공항 라운지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라운지에서 안락함을 누리며 지난 6일의 시간들을 반추해보니 미얀마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왔지만, 되려 제가 받아간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사기간 내내 저희를 에스코트 해주신 미얀마 현지 경찰, 맨발로 물을 건너 발이 더러울 때 선뜻 집의 우물을 내어주신 미얀마 주민, 별것도 아닌 일에 감사를 표하던 사람들, 그리고 저와 함께 고생해주신 선생님들, 교수님들, 봉사단원들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며 후기 마치겠습니다.
의대에 입학하기 전부터 내 로망은 의료봉사였다. 의사가 꿈인 나에게, 의사라는 직업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져 보이는 일이었기 떄문이다. 그래서 동아리도 의료봉사를 할 수 있는 동아리를 선택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내 로망과는 다르게,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잡일 뿐 이었고, 의학과에 진급해서 알게 된 의료봉사의 현실은 좋지 않았다. 국내엔 무의촌이 없을뿐더러, 환자들도 다 자신의 질환을 알고 있고 이미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서 해주는 것이라고는 약물의 오남용과 수액 주는 것 뿐 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의료가 부족한 곳에서, 그것도 해외에서 하는 의료봉사라니! 평소 귀가 좋지 않아서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비행기를 네 번 타게 되어도 좋을 만큼 좋았다. 같이 가게 된 사람들도 정말 좋았고, 현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도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하자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4일 동안 있게 된 병원은 병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위생적이고, 마땅한 의료 기계도 없고, 전기 끊기는 것이 일상적인 공간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오는 환자들은 정말 많았고, 내가 교과서에서만 봤던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4일 동안 소아과, 안과, 약국, 외과에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아 환자들을 볼 때 였다. 찾아오는 어린 환자들은 비타민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을 만큼 정말 귀여웠다. 똘망똘망한 눈에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조차 예뻤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VSD와 PDA가 있는 소아 환자를 다른 방법이 없어 그냥 보낸 것, 백내장이 있는 영아 환자를 그냥 보낸 것, 눈꺼풀에 염증이 난 소아 환자를 그냥 보낸 것 모두 다 지금까지 생각날 만큼 너무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였다면 조기에 치료를 해서 이만큼 더 아프지는 않았을 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팔에 이상이 생긴 소아 환자는 현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정말 마음이 놓였다.
안과에서 있을 때의 기억도 많이 남는다. 안과에서 교수님을 도와드리기 하루 전, 내 자신이 렌즈를 끼다가 각막을 다쳤기 때문에 앞이 보인다는 것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안과에 찾아오는 환자들은 생각보다 백내장 환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단순히 안경으로 시력 교정만 하면 되는 환자가 많았다는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미얀마에서는 안경이 약 4만짯으로, 한국 돈으로 4만원 정도 되는데 미얀마 가정의 1/4 정도의 수입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쓰거나, 아예 안경을 맞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경을 맞춰주는 봉사활동도 정말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4일 간 의료봉사를 하면서 거의 2000명이나 되는 환자들을 보면서도 최대한 한 명이라도 더 보려고 하셨던 의사 선생님들이 정말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물론 앞으로 몇 년 동안은 pk와 인턴, 레지던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참여하기 어렵겠지만, 전문의가 되고 나서는 꼭 다시 참여해서 환자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20여년 동안 해외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나에게 해외 의료봉사를 가는 것은 언제나 마음 속의 바램이었다. 의과대학을 지원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실력 있는 의사가 된 후에 의료혜택을 받기 힘든 나라들에 가서 봉사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잦은 지진과 쓰나미, 화산폭발과 홍수, 폭동과 테러에 대한 두려움에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도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여태까지 마땅히 의료봉사를 갈 기회를 갖지 못했었는데, 이번 7월 8일~7월 14일, 5박7일동안 떠난 이태석 국제 의료 봉사단의 미얀마 의료봉사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미얀마 의료봉사에서 첫날은 산부인과에서 보냈다. 양종필 선생님께서는 가장 먼저 환자들과 소통을 할 수 있도록 미얀마 언어를 익히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조금 지나다 보니 서툰 미얀마 말이지만 나름 능숙(?)하게 입에서 튀어나왔다.“밍글라바~ 아떼 베네레레?” (몇살이세요?) “레떼 삐비라?” (결혼 하셨나요?) “클래 베네야 쉬라?” (아이가 몇 명 있나요?)
양선생님의 진료를 돕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매일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면서 환자들에 대해 기록을 해두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쌍둥이를 임신한 산모였다. 산모는 우리가 있는 병원의 간호사다. 아이들의 심장소리가 초음파를 통해서 들리자, 간호사 친구가 즐겁게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였고, 산모는 너무나 기뻐서 함박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 나도 너무 감동적이어서 사실 눈물이 살짝 고였었는데 부끄러워서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통역하는 미얀마 언니가 살그머니 휴지를 건내 주었다.
셋째날은 마취과에서 이근무 교수님과 함께 환자를 보았다. 마취과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의 다리가 아프신 어르신들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병원을 찾은 환자들 몇몇은 아픈 관절부위에 알 수 없는 나뭇잎을 대고 붕대를 감고 오는 것이다. 미얀마 민간요법인 것 같았다. 미얀마 어르신들도 한국 어르신들과 비슷하게 아프면 주사를 맞고 싶어하였다.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보시면서 주사도 놔주시는 교수님이 언제나 웃으시면서 진료를 하시는게 너무나 멋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오른쪽 어깨관절이 아프신 할머니였는데, 팔을 들기조차 힘드셔서 교수님께서 주사를 놔주셨다. 그런데 주사를 맞고 불과 몇 초 후에 할머니께서 어깨를 자유롭게 돌리실 수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기쁘셔서 나의 손을 꼭 잡고 연거푸 고맙다고 하셨다.
소아과는 둘째날과 마지막날, 허윤정 교수님과 안소정 선생님을 도와서 환자들을 보았다. 아이들한테 “밍글라바~”라고 인사를 하면 천사 같은 미소로 웃어주거나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소아과 진료를 하면서 너무나 마음 아픈 환자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는 발달이 느리다고 온 아이였다. 아이의 콧등은 넓고 낮았으며, fish mouth를 볼 수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genetic syndrome이라고 하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얼른 병원에 가서 유전자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소아과에서는 내과 환자도 많이 보았다. 아이들이 대부분 학교를 가서 소아환자는 많지 않았지만, 내과 환자는 넘쳐났기 때문이다. 내과를 찾은 환자들은 대부분 고혈압과 당뇨로 온다. 봉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미얀마 음식은 대부분 짜고 매우 기름졌다. 고혈압 환자가 많은 이유도 이런 식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내과를 들리는 환자들 중에는 다른 과 진찰을 받고 싶어 하는 환자들이 많아, 나는 환자들을 다른 과 진료실에 데려다 주는 일이 많았다. 환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환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 같다. 우산 없이 뛰어다니는 나에게 우산을 씌워 주셨고, 어떤 분은 뛰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 자신의 가방으로 비를 막아 주셨다. 내가 다음 진료장소로 데려다 주면 사탕을 주는 아이도 있었고, “Thank you very much!”라고 능숙한 영어를 하시면서 악수를 청한 멋진 할아버지도 계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서 행복하였다.
미얀마 의료봉사 기간 중에는 비가 많이 와서 날씨도 매우 습하고 더웠는데, 하루에 600여명이 넘는 환자들이 몰려와 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의료봉사를 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추억들도 많이 쌓았다. 첫 의료봉사인만큼 환자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접수에서 내가 직접 혈압을 재서 고혈압 환자를 발견하고, 그 환자가 내가 잰 혈압수치 때문에 혈압약을 처방받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였다. 주사 맞을 부위를 직접 소독하고, 환자들이 아플 때 내 손을 꼭 잡은 순간들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나의 의학 지식이 아직 얼마나 부족한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봉사활동 첫날 양종필 선생님의 “저 사람들은 우리 없어도 잘 살아요”라는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는 의료인이 되고 싶다. 어려서부터 봉사활동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봉사는 ‘giving’이 아니라 ‘sharing’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졸업을 하고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 꼭 다시 내가 살았던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나에게 소중한 경험과 따뜻한 추억을 갖게 해주신 선생님들, 스태프, 그리고 봉사단원들 모두 제주띤바레~! (감사합니다!)
7월 8일에서 14일까지 미얀마 해외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저로서는 처음 가보는 해외봉사였고 더군다나 외부에서 하는 첫 번째 봉사였기에, 보다 더 큰 기대감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을 가지고 봉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에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환자들을 매우 많이 보았습니다. 유방암 말기, 몸 어딘가에서 덩어리가 만져지는 환자들, 그리고 감염병 환자들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안타까웠던 환자들은 미얀마 현지에서의 수술 등이 잘못되어서 그에 의해 합병증이 오거나 신경손상, 피부 위축 등의 환자들이었습니다. 이근무 교수님과 통증의학/정형외과에 있었을 때, 16살 남아가 발가락이 잘 펴지지 않는다고 찾아왔습니다. 2년 전에 엉덩이 주사를 맞은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신경을 잘 못 건드려 이렇게 된 것이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문제는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16살 청소년이기에 앞으로 성장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현지의 의료사고로 인한 환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반면, 대부분의 환자는 퇴행성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외과에서도, 통증의학과에서도 제가 본 환자의 80프로는 퇴행성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비만으로 인해 증상이 일찍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자의 종류를 보며 미얀마의 국민 수준을 높이면 환자들이 저희가 오기 전에 충분히 예방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리 고탄수화물 섭취를 줄여 비만과 고혈압을 줄인다던지, 아니면 운동을 생활화하여 예방을 하는 등의 기본적인 조치를 취해주면 환자가 더 줄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미얀마에서 5일중 4일을 미얀마의 보건소와 같은 곳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4일동안 약 2500명의 환자들께서 방문하여 주셨고 저는 소아과, 외과, 통증의학과를 다니며 약 250명의 환자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정을 소화하며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힘이 빠지기도 하였고 매일 6시에기상하는 익숙하지 않은 일정 탓에 피곤하기도 하였지만 병원 봉사가 끝나는 5시쯤엔 피로가 풀리며 오히려 무언가 뿌듯한 기분이 느껴졌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현재까지 양로원에서도 봉사를 해보고 이런저런 봉사를 해보았지만 이번 봉사에서는 무언가 다른 뿌듯한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봉사를 끝내면 ‘아 끝났다. 피곤해’라는 생각이 있었던 제가 이번 봉사에서 고맙다고 활짝 웃는 환자분들을 보며 무언가 다른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진정한 마음에서 비롯된 봉사가 아닌 그저 봉사시간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봉사를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정말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느낀 것은 하루 약 100명의 환자를 보며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대하시는 교수님들을 보고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저 환자들을 보고 보조하는 역할만 했을 뿐인데도 오후 3시쯤 되니 힘들었습니다만, 교수님들께서는 힘든 내색하지 않으시고 수 많은 환자들을 보시며 똑같은 태도로 먼 길 달려온 환자들을 대하여 주셨습니다. 환자분들도 진료 한 번 받으시기 위해 멀리서부터 오신 분들도 계셨고, 매우 오랜 기간 기다리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걱정과 두려움을 가진 환자들도 계셨습니다. 교수님들께서는 모두 알고 행동하는 듯 보였습니다. 수 많은 환자들을 보시고 본인의 전공이 아닌 환자가 오셔도 미리 공부를 하시고 환자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케토톱’이 교수님들에게도 하나씩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고 매우 존경스러웠습니다.
지난 5박 7일 동안 좋은 사람들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느낌을 얻어서 올 수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매주 술만 먹고 의미 없이 방학을 보냈겠지만, 이번 방학은 뭔가 알차고 뜻 깊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기회가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자원하고 싶고 후에 전문의가 되어서도 이 경험에 꼭 참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건강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을 선망해왔다. 감사하게도 내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부모님이 계셨고, 운이 좋게도 내 노력을 배신하지 않을 정도의 재능도 내겐 있었던 것 같다. 길고 긴 입시가 끝나고 의과대학 입학을 통해 오랜 꿈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작년의 난 입시에서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고, 해외 의료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공지는 새내기 의대생이었던 나의 허영심에 안성맞춤이었다. 지체 없이 지원 서류를 보냈지만 이태석 기념 사업회 교수님들의 안목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이후 학교생활을 하면서 내가 어렸을 때 의료직을 선망해왔던 이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1년이라는 기간 동안 ‘내가 누려왔던 것에 대해 감사하고, 받은 만큼 베푼다’는 내가 남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어 하는 동기를 확실히 했다. 올해 다시 해외 의료 봉사에 지원할 기회가 왔을 땐 조금 더 신중하고 솔직하게 지원 서류를 작성했고, 선발되었다는 공지를 받은 뒤엔 1년의 학교생활이 내 자신을 조금 더 성숙시켰다고 느꼈다. 그렇게 타지로 간다는 부모님의 걱정과 동기들의 축하를 등에 업고 미얀마로 향하게 되었다.
미얀마에 도착한 이후 봉사 활동은 내가 그 동안 국내에서 경험했었던 병원 봉사활동과는 사뭇 달랐다. 환자들이 끊임없이 줄을 섰고, 교수님들은 점심을 드시는 1시간을 제외하고 쉼 없이 말이 통하지 않는 환자를 진료했다. 오전 일찍 시작한 진료가 오후 5시를 전후로 끝이 나면 너무 피곤해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부터 잠이 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즐거움 역시 있었다. 내게 가장 의미가 있었던 순간은 봉사 둘째날 오전 진료 시간에 찾아왔다. 봉사 단원 중 내가 배움의 시간이 제일 짧았기에 의료 지식의 부재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과 실재는 언제나 다르다. 둘째 날, 환자의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니 다시 재봐야겠다는 내과 교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예과 2학년생에게 무력감을 주었다. 물론 이순희 내과 교수님은 할 줄 없는 게 없는 학생을 다정하게 웃으면서 이해해주셨다:) 그러나 미얀마에 가서 내가 누려왔던 것들을 보답해야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내게 무지에서 비롯된 그 낯선 무력감은 쉽게 떨쳐내기 힘들었다. 둘째 날 일정이 끝난 뒤부터 모든 봉사 일정이 끝날 때까지 그 순간을 끊임없이 반추해 보았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보답해야겠다 혹은 무언가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거만한 생각인지 알 수 있었고, 주위를 좀 더 겸손한 시선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목과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환자를 진료하는 교수님들과, 사람이 북적북적한 더운 로비에서 땀을 흘리면서 노력하시는 선생님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 국어사전에 실린 ‘봉사’라는 단어의 정의이다. 내가 미얀마에서 봤던 의료진분들의 모습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땀을 흘리고, 미얀마 병원 환경 개선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교수님의 모습은 커다란 감동이었다. 봉사가 모두 끝나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거기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 않아도 충분히 잘 생활해왔다’는 양종필 교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거만하다. 함부로 남을 불쌍히 여기지 마라’는 아빠의 가르침이 겹쳐 떠오른다. 미얀마 봉사는 내가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주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내가 미얀마에서 느낀 것을 절대 잊지 않고, 항상 명심하여야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상 나를 응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며, 이번 해외 봉사 활동 기간 내내 나를 걱정했던 우리 부모님께, ‘엄마아빠, 그동안 엄마아빠가 주셨던 사랑을 그 나라 사람들과 조금 나누고 왔어요. 나를 믿어줘서 항상 감사합니다.’
“꺼마우 시미따!”쉐비다 지역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한지 3일 째. 오늘 할, 진료를 준비하기 위해 그날도 줄을 선 많은 지역사람들을 지나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귓가에 저 말이 들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여섯 명의 사람이 저희를 향해 그렇게 말을 해주어, 무슨 뜻일까- 들어가면서도 꽤나 궁금해 하였습니다. 미얀마 어라고 생각했던 저는, 통역을 담당하던 언니에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물어보았으나 잘못들은 것이 아니냐는 답변만 돌아왔고 하루 종일 그 말이 무엇일지 궁금했습니다. “꺼마우 시미따, 꺼마우 시미따.” 호텔로 돌아와 두어 번 입에 그 말을 내뱉어보자 그제야 그 말이 '고맙습니다.'를 서투른 말로 표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재미있었게 들었던 것은 ‘건강사정’이라는 이름의 과목이었습니다. 환자에게 질문을 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라포를 형성하고, 그리고 환자가 어디가 아픈 것인지 사정을 해보는 과정 전부 흥미롭게 들었던 강의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로 배우는 병원과 임상에서의 병원은 달랐습니다. 병동을 중점적으로 진행되었던 실습은 그런 것이 활용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게 이틀째가 되는 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통증의학과에 업무가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근무 교수님과 함께 일하며 저는 배웠던 지식을 하나하나 이해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증상을 보고 Osteo arthritis 인지 Rheumatoid arthritis 인지 구별해 보기도 하고, 환자의 상태 따라 약물을 어떻게 처방해야하는지, 무슨 테스트를 하여 환자상태를 판단하는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나오자 저는 두근거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시험을 칠 때의 기분과는 달랐습니다. 제가 아는 지식이 환자에게 올바른 처방을 내리는 것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니, 진심으로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습하면서 임상에서 닦았던 실력을 활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내과 진료를 환자들의 BST를 체크하였고, 접수처에서는 실습 때 수십 번을 반복했던 V/S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이 지식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회의감이 많이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배운 것이 활용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함께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제가 배운 것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지역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안타까움과 웃음이 넘쳐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심한 당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해 심각한 당 수치를 기록하는 환자, 아이가 유산되었음에도 임신 2개월째라 여기며 아이를 걱정하는 환자 등 안타까운 환자가 있었던 한편. 드디어 임신이라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가는 환자, 다리 아픈 것이 나아져서 정말로 기뻐서 다시왔다고 말하는 환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밍글라바-, 밍글라바-” 안녕하세요. 라는 웃음을 가득 담고서 오가는 인사가 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지만, 그 안에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감정들이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두근거림, 건강한지 알아보고 싶은 궁금함 등이 스쳐지나가는 그 인사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다녀온 봉사가 어땠는지 묻는다면 저는 의료진과 환자가 면대 면으로 앉아 고민을 나누고 들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봉사였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은 아파지고, 기본적으로 하루에 100명은 넘는 환자를 봐야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일어났을 때는 어깨가 뭉쳐서 스트레칭을 하는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병원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여러 표정을 볼 때마다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는 다짐을 가지고 병원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미얀마를 향해 봉사활동을 다시금 가고 싶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밍글라바!” 웃으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고 싶습니다-로 감상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