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관리자access_time 2017.04.20 10:38visibility 149
웃는다.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 엉겁결에 같은 물건을 집었을 때 그들은 환하게 웃는다. 선물같은 그 미소는 캄보디아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봉사는 베품이 아니라 나눔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현지에 도착해서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봉사는 베품이 아니라 참여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내겐 의외였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 물품을 가지고 캄보디아까지 가서 봉사를 하는데 우리가 하는 행동이 베품도 나눔도 아니고 참여라니. 첫 날 헤브론 병원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첫 의료봉사는 헤브론 병원에서 시작됐다. 병원 마당에 들어서니 온통 사람천지였다. 한쪽에서 정신없이 애들을 챙기고 있는 엄마 옆으로 쪽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저 멀리 강단에서는 누군가가 성경말씀을 읽어주고 있었다. 짐을 챙기고 수술방에 들어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난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수술을 해주는 것이었다. 기형적인 손가락을 가진 아이, 자궁 탈출증으로 자궁적출을 해야하는 어머니, 등에 난 혹을 제거해야하는 할머니 같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한 번은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절제하러 수술방에 들어왔는데 많이 불안했는지 이리저리 눈을 희번뜩인 적이 있었다. 우리 의료팀은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주었지만 아이의 불안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짠나가 아이 옆으로 다가갔다.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캄보디아 친구인 짠나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통역해주기 시작했다. 짠나가 수술대에 누워있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 마디 두 마디 하자 진정이 된 아이는 아픔을 이겨내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아이의 감은 두 눈을 보면서 의료봉사가 베품이 아니라 참여라는 의미를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수술 일정에도 짠나는 나와 눈만 마주치면 씩 웃으면서 힘든 내색 없이 아픈 이들과 함께 했다. 짠나가 우리와 환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헤브론 병원에서의 봉사가 이번처럼 성공적이었을지 모르겠다.
우리를 도와 통역을 했던 캄보디아 친구들은 짠나 뿐 아니라 8명이 더 있었다. 우리보다 자음이 더 많은 크메르어로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에 한글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리까, 낌리응, 까, 위찌안, 래스마이, 비썩, 다닛, 잔턴 이렇게 8명이 층액 보건소에서 4일동안 함께했다. 본과 2학년 우리 세명이 층액 보건소로 봉사를 하러 가게 된 건 3일째 되는 날 부터였다. 층액 보건소는 킬링필드를 옆에 두고 있는 한갓진 지역에 있었다. 평소에는 운영되지 않는 보건소였기 때문에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황량한 모습이었는데, 그 곳에 우리가 도착하게 되면서 사람이 꽉 들어차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보건소에서 나의 첫 날은 접수부서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총 4명이서 2명씩 접수를 맡았는데 나는 주로 환자의 혈압과 체온, 맥박을 재는 일을 담당했다. 가끔씩 접수하러 오시는 분들이 다 할머니 할아버지 같아서 코끝이 찡하곤 했다. 내원한 분들은 당연히 크메르어를 사용했다. 영어를 사용했다면 손짓 발짓 해가면서 어떻게든 알아들었을 테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크메르어로 머리, 허리를 가리키며 아프다고 찡그리는 환자분들은 날 당황하게 했다. 이럴 때 언제나 내 옆에서 대신 의사소통을 해준 래스마이가 있었다. 래스마이는 두통이 있다, 요통이 어제부터 시작됐다 처럼 정확한 의학용어를 사용해서 알려주고는 했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자신이 정리한 한국어 파일을 뒤적이면서 최선을 다해서 통역을 도와주었다. 그제서야 좀 알 것 같았다. 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참여인지를 말이다. 우리가 이곳으로 봉사활동을 오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열심히 준비해왔던 것만큼 이곳 친구들도 우리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피나게 노력해 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층액 보건소에서 봉사는 계속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약국을 맡아서 약을 지어주는 일을 했는데 모든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순간에는 오늘이 마지막 봉사구나 라는 생각에 내심 섭섭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를 도와주었던 캄보디아 친구들은 볼 수 없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웃음짓던 그들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번 봉사는 참 새로웠다. 이제껏 해왔던 봉사들은 나의 힘으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나의 힘에 다른 사람의 힘을 보태어 뜻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봉사를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봉사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봉사를 가신 교수님,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의료팀 친구들 그리고 캄보디아 친구들 모두 존경스럽다. 항상 웃음이 함께했던 이번 봉사는 앞으로도 종종 생각날 것 같다.
기나긴 본과 2학년 1학기가 끝나자 마자 저는 학기 중에 신청한 캄보디아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바로 출국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이번 캄보디아 의료봉사활동은 부산국제교류재단과 (사)이태석 기념사업회에서 주관을 하고 인제대 의과대학 재학생 및 부산백병원, 해운대백병원 의료진이 참여하는 큰 규모의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캄보디아로 출국 5일전 부산시청에서 열린 봉사단 발대식에 참여를 했을 때, 드디어 의료봉사를 가는구나 실감이 났습니다. 발대식 후 처음으로 참석한 봉사단 미팅에서 봉사단원들과 첫 인사도 나누고 전체적인 봉사계획과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희 학생들은 모임에 첫 참석이지만 교수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께서는 수 개월 전부터 지속적으로 모이면서 약품도 준비를 하고 수술기구들도 준비를 하고 현지 답사를 통해 봉사가 계획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오신 것을 보고, 해외 의료봉사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히 계획을 해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교수님들께서 봉사계획수립부터 준비과정까지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게 가르쳐 주셔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7월 14일 아침 김해국제공항에서 출발을 하여 베트남을 경유하여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7월의 캄보디아는 무척이나 무더웠습니다. 햇빛은 따가웠지만 밤에는 비가 오는 특이한 날씨였습니다. 저희 봉사단은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날부터 시작될 봉사활동을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첫 이틀은 수술팀에 속해져 헤브론 병원에서 봉사를 하였고, 마지막 이틀은 진료팀에 속해서 킬링필드 지역의 보건소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헤브론 병원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환자분들께서 병원 앞에 계셨습니다. 원장선생님께서 저희 봉사단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헤브론 병원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헤브론 한국병원은 한국인 의사분들이 세우고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 진료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헤브론 병원에서 고생하시는 선교사분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사람도 아닌 한국사람들이 훌륭한 병원을 세워서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저는 헤브론 병원에서 수술팀의 진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아서 했습니다. 또한 교수님들께서 수술을 참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처음으로 수술방에도 들어가보고 Appendectomy와 Hysterectomy 등 학교에서 배운 다양한 수술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봉사 3일째부터는 킬링필드 지역에서 진료팀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 맡은 임무는 예진을 통해 환자분의 혈압과 체온을 측정하고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로 환자를 분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렵기도 했지만 반복적으로 수행을 하니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봉사 마지막 날에는 약국에서 약을 제조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교수님들의 처방전을 보고 알맞은 약들을 정확한 양을 포장지에 넣는 역할이었습니다.
좁은 골방에서 더위와 싸우며 일을 하다보면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힘든 상황에도 약을 받아 들고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환자분들을 보고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정말 감사하게도 캄보디아의 많은 사람들이 저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특히 한국어 통역을 맡아주었던 왕립 프놈펜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 10명은 봉사내내 싫은 내색 한번도 하지않고 열심히 일을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같은 나이또래라서 그런지 나중에는 서로 장난도 치고 SNS도 주고받는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정말 잊지 못할 소중한 인연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놈펜 시장님께서도 저희들에게 성대한 환영만찬을 열어주었습니다. 봉사에 지친 우리들에게 단비와 같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지치는 봉사기간에도 같은 봉사단원 많은 친구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즐겁게 놀았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봉사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프놈펜 왕궁과 앙코르와트 투어까지 정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God bless you"이 3단어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은 한창 지쳐가던 봉사 3일째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셨던 캄보디아 아주머니께서 저와 저희 봉사단원들에게 해주신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카톨릭 신자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대화 끝에 이 문장을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저는 이 문장을 처음 들어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께 이 말을 듣는 순간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제 가슴은 감동으로 벅차올랐습니다. 그 동안에 힘들었던 일들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진정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하는 동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그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힘들었던 일 모두가 신께 축복을 받을 정도로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분들과 함께 한다라고 생각해라"고 말씀해주신 이종태 부학장님 말씀이 가슴 깊이 느껴졌습니다. 진정한 봉사활동은 이분들을 진료하고 약을 처방해 준 것이 아니라 이분들과 함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저에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주신 이병두 학장님, 이종태 부학장님, 김재천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외봉사활동 기회를 만들어 많은 학생들이 제가 느꼈던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캄보디아에 처음 갔었던 것은 7년 전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톤레샵 호수에 있는 수상 가옥 빈민촌이었다. 어려운 사람들의 생활 실상을 가까이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권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열악한 위생의 생활환경, 한 눈에 보아도 건강하지 못해 보이는 그들의 외관, '빈곤'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지친 표정을 보았다. 그때는 여행을 하던 중이라, 그들을 도와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 때의 경험으로부터 생긴 의료봉사에 대한 열망과 막연한 동경은, 이번 여름방학에 학교의 도움으로 인해 실현될 수 있었다.
의료봉사를 시작하기 전날 밤에, 봉사단장님께서 해준 말씀이 기억이 남는다. 봉사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라고. 그 말씀을 들으니 책에서 본 내용 또한 어렴풋이 떠올랐다. '봉사'라는 것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봉사라고. 봉사를 하면서 어떠한 깨달음이 봉사의 의미를 '함께'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들 수 있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캄보디아에 있던 7일 중, 의료봉사는 총 4일간 하게 되었다. 내가 4일 중 처음 2일에 배정된 곳은 헤브론 병원 수술실 봉사였다. 프놈펜에 있는 헤브론 병원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 병원이며, 현지인들에게는 한국인 병원이라고 불리며 신뢰도 또한 높은 병원이다. 헤브론 병원에 처음 도착했을때, 생각 외로 바글바글한 환자들의 모습에 놀랐다. 병원 외부에 간이 의자들을 놓고 선교를 하는 모습들과, 병원 로비에서 햇볕을 피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서 낯잠을 청하는 모습들이나, 내가 생각하는 질서정연한 병원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백병원의 수술팀 의사분들과 간호사분들과 함께 한국에서 가져온 수술 약품들을 병원 내부로 옮겨서 정리하고,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수술실에서 생전 처음 입어보는 초록색 수술복이 낯설었지만 앞으로 내가 무슨 봉사를 할 수 있을지 설레기도 했다. 한국 의료진 외에도, 수술실에서 한국어를 크메르어로 통역해줄 왕립프놈펜대학교 한국어과 학생인 짠나도 함께 봉사하게 되었다.헤브론 병원에서 수술하게 된 환자는 주로 외과 환자가 많았다. 내가 수술팀에서 봉사하는 이틀동안 수술환자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다지증을 앓고 있어서 엄지손가락이 기형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어린이, 자궁 탈출증이 있어서 자궁 적출을 해야 하는 중년의 여성, 발의 일부를 절단하여 치료중이지만 캄보디아의 높은 기온으로 인해 감염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죽은 조직들을 제거해야 하는 젊은 남성, 손에 감전이 되어 피부이식술을 해야 하는데, 상처의 감염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피부를 뗀 자리의 감염 또한 걱정하며 수술해야하는 중년의 남성, 캄보디아 봉사팀 중 진료팀이 봉사하고 있는 보건소에서 발견하여 우리 병원으로 보내온 맹장염 환자, 등에 큰 종기가 나서 생활하기가 불편하다는 할머니, 입 안에 덩어리가 자라서 제거해야 하는 할아버지.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의료진들께서 치료해주고, 돌봐주셨다.제일 기억에 남는 건, 첫 번째로 수술한 다지증 어린이였다. 수술실로 들어온 이 아이는, 난생 처음본 외국인인 우리를 보고 잔뜩 겁먹은 눈치였다. 아이가 아주 어린데다가 자신을 수술할 사람들이 외국인들이라는 것을 보면 놀랄 것은 당연했다. 수술실에 아이가 눕고 마취를 하자 아이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집도의께서 아이에게 한국어로 "괜찮다, 조금만 참아, 울지마 꼬마야" 등등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많은 말을 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약간 불안해 보였다. 이럴 때 통역 학생 짠나가 톡톡히 역할을 해 주었다. 짠나 학생이 이들에게 친숙한 크메르어로 이 아이를 다독거리며, 웃으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몇 마디 말을 하니 아이는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짠나가 있었기에 환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수술할 수 있었고, 캄보디아인 환자와 한국인인 우리 사이에 감정의 통로를 놓아준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빡빡한 병원 수술 일정에도, 짠나는 힘들다는 투정 한번 부린 적 없이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수술과 피가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수술방에 항상 서있으면서 행여나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따뜻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던 친구였다. 우리 의료진이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보내드렸던 환자마다 우리에게 손을 모으고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웃으며 수술실을 나가는 그들의 얼굴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지만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봉사는 단순히 남을 돕는 것 뿐만 아니라 날 기쁨에 웃음 짓게 하는, 마음에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캄보디아 봉사의 나머지 이틀은 프놈펜 외곽 지역에 있는, 킬링필드 옆의 층액 보건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킬링필드의 잔혹하고도 아픈 동족상잔의 역사 옆에서 살아온 그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보건소나, 병원으로 갈 수 있는 주민들은 그나마 생활수준이 괜찮은 것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의 오지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우리의 의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층액 보건소는 정말, 황야에 돌로 된 황량한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의료진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쓰이지 않는 보건소이다. 외과,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의 4개 과가 진료함에도 선풍기는 단 2대 뿐이었다. 첫날에는 자궁암 검사 봉사를 하였다. 자궁경부암 screening 검사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불편한 검사인 만큼 검사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여성들도 있었다. 불편한 검사인 만큼 환자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최대한 이완된 자세에서 검사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나와 함께 한 통역 학생의 이름은 낌리응이었다. 낌리응은 탁월한 한국어 실력으로 산과 문진을 해주었고, 환자들이 긴장하지 않게 해주었다. 의학 전공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의학용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산과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환자들에게 능숙하게 잘 전달하는 모습에 놀랐다. 물론 의학용어를 알아듣기 위해 공부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봉사 마지막 날은 보건소 소아과 진료보조와 초등학교 페이스 페인팅, 구충제 먹이기 봉사를 했다. 소아과 민명희 선생님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료하셨고, 크메르어를 익히셔서 진료에서 활용하시기까지 하는 열의를 보였다. 바쁜 진료를 하시면서도 후배 의사인 나에게 진료는 어떻게 하는 거다. 소아는 체온을 유의깊게 봐야 한다. 등 선배 의사로써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의사의 노력이 있고, 통역 학생의 노력이 더해져 환자와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의료봉사를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참된 봉사의 의미임을 느꼈다. 점심을 먹고 층액 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페이스페인팅과 구충제 먹이는 일을 했다. 미술 전문이 아니어 서툴렀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듬뿍 받고 싶어 하는 캄보디아 아이들에겐 충분했다. 같이 페이스페인팅을 했던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애들 마음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 한국에서는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도 맘에 안들면 울고 떼쓰고 다시 해달라고 난리일 때도 많은데. 여기 애들은 그림 그려주면 그저 고맙다고 환하게 웃어주니.." 아이들의 맑은 웃음을 보니, 반나절 땡볕에서 그림을 그리고, 구충제를 갈아 먹였어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아픈 건, 신발이 없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중에 캄보디아를 가게 될 사람들이 있어, 캄보디아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헌 옷가지와 신발을 꼭 챙겨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봉사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몇 가지의 생각과 다짐을 하게 되었다. 헤브론 병원은 수술실이 있지만 수술할 수 있는 의사와 마취과 의사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다른 나라의 의사들이 헤브론 병원으로 오지 않는 이상 거의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술할 수 있는 외과 의사가 된다면 헤브론 병원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한 번보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그들의 질병을 관리하는 측면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또 한 가지는, 층액 보건소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 "다음에는 언제 오세요?" 나는 이 대답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봉사가 끝나고 모든 차트를 정리하면서 이 나라는 후진국임에도 고혈압이 상당히 많고,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관절염, 디스크 등 만성 질환이 많다. 일회성 봉사라면 환자들이 현재 호소하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밖에 하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열이 있는 환자에게는 해열제를, 배가 아프면 진통제를, 어깨 등 근육 통증이 심한 환자에게는 리도카인을 국소 주입하는 등의 치료이다. 하지만 해외 봉사를 정기적으로 할 수 있고, 환자들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기초적인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을 시행할 수 있다면 질환을 근본적으로 치료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과도한 물질적, 금전적 원조는 자칫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여 국가 발전에 오히려 저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의료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선진국의 발달된 의료 혜택을 나누어 주는 것은 국가에게 이익이 되지,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진국으로의 정기적인 의료 원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봉사를 마치고 낌리응이라는 통역 친구가 우리와 헤어지기 전에 한국어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 캄보디아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캄보디아도 더 발전해서 다른 어려운 나라들을 도울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젊은 나이인데도 나라를 생각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미래에 나라를 이끌어갈 지식인인 대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으니, 캄보디아의 미래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캄보디아 봉사를 위해 소중한 여름휴가를 내셔서 오신 여러 의사분들과 간호사분들도 정말 멋있었다. 어른이 되고 직업이 생기면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낯선 땅으로 봉사하러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휴가때 편히 쉬는 것과 누군가를 위해 땀흘려 봉사한다는 것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봉사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인생의 선배들에게 배운 이런 숭고한 마음들을 잊지 않고 간직할 것이다. 내가 의사로 성장할 때까지 캄보디아에서 봉사했던 날들이 선물해준 소중한 감정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할 것이다.
2013년 7월 14일 뜨거운 여름날, 부푼 기대와 떨리는 마음을 안고 해외 의료봉사를 위해 부산과 자매도시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향했다. 베트남 호치민 시티를 거쳐 이동 시간만 무려 8시간, 숙소까지 도착하는 데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역시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서 인내는 필수다. 준비해 온 각종 수술기구와 약품, 물품박스를 풀어 정리하고 내일부터 있을 보건소 진료를 위해 각자 역할 분담을 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 15일부터 16일, 이틀 동안 언뚱마을 보건소(Kork Roka Health Center)에서 환자들을 진료했는데, 나는 첫날에는 약국, 둘째 날엔 환자 접수를 배정 받았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모였는지 이른 아침부터 보건소 앞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마을 주민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현지보건소로 들어서는 순간, 한국과는 많이 다른 캄보디아의 열악한 보건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료장비는 커녕, 테이블과 의자, 환자들이 누워 쉴 수 있는 침대가 전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몰려온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위해 약품을 꺼내 분류하기 시작했다.
병원진료는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로 나뉘었는데 약품 역시 과별로 나눠 소화기, 호흡기, 해열, 진통제, 항생제를 질환 별로 나눴다. 환자접수는 환자들에게 손목 넘버링과 번호표를 주어 대기하게 하고 접수대에서 순서대로 접수 받았다. 혈압과 체온을 재고 이름과 나이, 주증상 (C.C:Cheif Complain)을 현지 통역 학생들을 통해 들어 차트에 적고 진료 받을 각 과로 안내했다. 그리고 교수님들의 진료 후 약을 처방해주시면 약국에서 약을 제조하고 환자에게 복약 설명을 했고 구충제를 바로 복용하게 하도록 했다.
이 접수부터 환자 안내, 진료, 약 제조 후 복약 설명까지의 과정이 정말 간단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 꽤 어렵고 복잡했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하고 설명하는데 있어 시간이 오래 걸려 참 답답했다. 그리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환자에 좁은 보건소 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금세 시장 통처럼 되기가 일쑤였다. 특히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오다 보니 약국에 약을 기다리는 사람이 엄청 늘어나 약이 밀리기 시작했고 환자들은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자 나는 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고 약 이름이 생소해 약을 빠르게 찾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그러나 지루할 법도 한데 캄보디아 사람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너무나 고마워하는 덕분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리고 나는 환자 접수 때 조금이나마 캄보디아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간단한 크메르어 인사말을 외웠는데 몇 번을 되뇌어 보아도 잘 외워지지가 않았다. 준립쑤어 (안녕하세요), 어꾼 (감사합니다), 리하이 (잘가요) 이 3개만이 내가 그들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3마디에도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에 나는 봉사 내내 정말 행복했고 즐거웠다. '정말 이 사람들은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구나.'라고 느꼈다.
캄보디아는 더운 날씨에 맵고 자극적은 음식을 자주 먹는 나라라 그런지 사람들은 소화기질환과 피부질환 환자가 많아 보였고, 아이들은 주로 호흡기 질환인 감기가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환자 중에서 제일 안타까웠던 환자가 있는데, 내과 환자로 담석과 담낭염이 많이 진행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로 잘못하면 복막염으로까지 번질 위험 있는 환자였다. 환자는 평상시에도 잦은 복통과 속쓰림을 앓았다고 하는데 이 상태까지 갔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치료를 받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이야기일까. 교수님께서는 절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니까 꼭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당부하셨고 안그러면 복막염 때문에 죽을 수 까지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에 환자와 환자 아내의 얼굴빛은 어두워졌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아프고 슬펐다.
17일에는 프놈펜에 있는 헤브론 병원 수술실을 참관했는데 이 병원은 의사선생님과 선교사님들이 세운 병원이라고 했다. 원래는 구순구개열 수술을 주로 하기로 했는데 이 날에는 환자가 없어 간단한 몇 가지 성형수술을 시행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캄보디아의 참혹하고 아픈 역사의 흔적인 킬링필드에 갔다. 무려 전 국민의 1/4인 2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선생님, 의사, 외국인,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참히 살해되었던 학살의 현장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끝나고, 베트남의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정치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라는 공산당에 의해 시작된 대학살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 이렇게 잔혹한 역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봉사 마지막 날, 18일날에는 킬링필드에 있는 보건소(Cheung Ek Health Post)에서 진료를 했다. 이 날에는 환자 진료실 안내와 보조를 맡았다. 환자를 진료 받을 과로 인도해 환자가 대기할 수 있도록 하고 환자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무엇하나 허튼 일이 하나 없듯이 이 또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100여명의 환자가 몰려왔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환자가 다른 잘못된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역시 봉사는 나 하나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날 봉사를 다 마친 뒤, 폭우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정말 신기했다. 모든 진료가 다 끝나고 대부분의 환자들이 떠난 후에 비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주는 시원한 선물인 것만 같았다.
이번 짧은 의료봉사를 통해 값진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의료혜택이 부족한 캄보디아에 비해 너무 풍족한 한국에서 사는 것,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것들에 한번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했다.
두 번째로는 베푸는 마음이다. 아직까지도 캄보디아는 혼자 자립적으로 성장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보였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봉사를 통해 남을 돕고 섬김의 자세를 고루 갖춘 참된 간호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따뜻하고 순수한 캄보디아 사람들을 통해서 봉사와 나눔을 내 나름대로 새롭게 정의 내렸다. "같이 소통하고 함께 웃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내가 느낀 것은 간호사로서의 꿈과 비전이다. 봉사를 하면서 이러한 봉사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봉사여야겠다고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소통 능력과 글로벌 마인드를 지닌 전문 의료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해외 의료자원봉사는 내게 또 다른 큰 도전과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런 내 꿈과 목표를 꼭 이루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외 의료봉사를 위해 준비하고 인솔해주시느라 애써주신 부산국제교류재단과 인제대학교 및 백병원 관계자분과 그 외 모든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저에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